국명의 통칭은 포르투갈(Portugal)이나 정식 명칭은 포르투갈 공화국(The Portuguese Republic)이다. 포르투갈이라는 국명은 국가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도시 포르투(Portucale)에서 유래했다. 포르투는 무어족에 의해 황폐화된 남부 Galicia 지방을 재조직하고 평정하기 위한 행정의 중심지로서, Douro강 어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대서양 연안을 이루고 있는 포르투갈은 유럽인들에게 사랑받는 `대서양의 관문'이다. 현재의 국가는 1957년 7월에 만들어져 같은 해 11월에 관보 제 199호를 통해 공포되었다.

포르투갈은 이베리아 반도 서단에 위치한 공화국으로, 스페인에 등을 대고 전면은 대서양에 임하 고 있다. 국토 면적이 9만 2,082 평방 Km 밖에 안되는 소국이지만, 일찍부터 해외에 진출하여 광대 한 식민지를 획득, 지금도 세계 여러나라의 지탄을 받아 가면서 계속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 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제적으로는 농업과 광업을 주 상업으로 하는 나라이며 스페인과 더불어 유럽에 서는 후진국에 머물러 있다.

포르투갈 문화예술은 풍부한 역사적 전통과 함께 민간 문화 재단의 지원을 받고 있다. 민간 문화 재단인 글벤키안문화재단(Gulbenkian Foundation)은 풍부한 재원과 경험 많은 운영진을 보유하고, 포르투갈 문화예술의 진흥과 국제문화 교류증진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또한, 포르투갈의 문학은 초기부터 발전한 다양하고 풍부한 서정시와 중세 이후에야 발전한 국민 서사시, 그리고 역사적 저술 등은 풍부한 편이나 극이나 전기, 수필 등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19세기까지 포르투갈의 문학은 거의 알려지지도 연구되지도 않았으며 처음부터 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초기에는 프로방스의 영향을 받다가 17세기에는 스페인의 문학이 문학적 표준이 되었고, 18세기에는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에도 영국 및 독일의 영향도 많았다. 특히 2세기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대부분의 포르투갈 작가들은 두 언어를 함께 사용했으며, 스페인 문학에서도 고전으로 꼽히는 스페인어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프르투갈 문학은 스페인의 문학과는 현저히 구별되는 개성을 지니고 있는데, 16세기의 질 빈센트의 희곡들과 함께 15세기 루이스 데 카몽드(Luis de Camoes)가 쓴 포르투갈의 역사서인 '오스 루시아다스'는 근대문학의 서사시들 가운데 가장 국민적인 작품이다. 소설의 경향은 19∼20세기초의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변천해 왔는데, 대표적인 사실주의 소설가로는 조세 마리아 에사 데 케이로스(Jose Maria Eca de Queiros)와 아킬리누 리베이루(Aquillino Ribeiro) 등이 있다.

그외에도, 포르투갈의 음악활동은 굴벤키안 재단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국립방송 교향악단인 National Broadcasting Symphony Orchestra와 포르토 교향악단, 리스본시향을 비롯한 여러 교향악단들이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아울러 민속음악과 전통민요의 일종인 파두(Fado) 등도 음악적인 표현양식으로 남아 있다.
또 다른 양대 예술사 방면중에 미술의 회화 부문은 15세기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초기 Nuno Goncalves파에 이어 플랑드로파의 영향을 받은 미술이 많았고, 이후 20세기에는 자연주의적 사실주의 시대가 이어졌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성 비센테의 제단화'를 그린 누노 콘살베스와 비제우파의 그랑바스코가 있다. 장식 미술로는 유약을 입힌 타일(Azulejos)이 유명하며, 16세기와 17세기에 지은 건물에는 청색과 백색등의 타일이 많이 사용되었다. 조각부문은 12∼13세기의 거대한 무덤에 주로 새긴 조각들이 많으며 18세기 후반의 바로크식 목조각 등도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 무용 역시 다채로운 민속무용이 각 지방의 종교적 축제에서 행해지고 있다. 대표적 지방무용으로는 Vira, Chuia, Corridihno, Tirana, Fandango 등이 있다.

유럽의 여러 나라 중에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약간의 낯설음과 독특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나라 바로 포르투갈이다. 포르투갈은 15세기에는 세계 최강의 해양대국으로 유럽에 군림했었다. 브라질을 식민지화 하여 남아메리카에 언어의 섬을 만들기도 했던 포르투갈. 현재는 유럽 후진국에 속하지만, 그 덕분에 싼 물가는 여행자에게 고마울 뿐이다. 드라마에 삽입되곤 하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검은 돛배Barco Negro’로 알려진 전통 가요 ‘파두Fado’의 애절한 선율로, 어쩌면 포르투갈은 우리에게 이미 친숙해진 나라일지도 모른다.

항공
한국에서 가는 직항편은 없고 유럽 주요 도시에서 연결되는 항공편을 이용해야 한다. 리스본과 포르토 등 주요 도시에는 국제공항이 있으며, 특히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는 리스본행 비행기가 매일 3∼4편이 있다. 파리와 로마, 런던, 취리히, 프랑크푸르트, 암스테르담, 코페하겐 등지에서도 리스본까지 취항하는 항공편이 매일 있다.


면적 : 약 92,000㎢

수도 : 리스본

인구 : 약 1,050만명

종교 : 인구의 99%가 카도릭을 믿는다.

주요민족 : 포르투갈인은 이베리아족, 켈트족, 게르만족, 무어족, 로마족이 혼합되어 있으나 주류를 이루는 민족은 지중해 민족인 켈트와 라틴계 민족이다. 그외에 소수민족으로는 아프리카 등지에서 이주하여 아조레스와 마데이라에 주로 거주하는 아프리카계가 있다.
포르투갈인들의 신체적 특징은 지중해주변 민족들과 유사한 편이다. 키는 유럽인들의 평균키보다 약간 작고 갈색 눈에 검은 색의 곱슬머리, 파르스름하거나 갈색피부를 가지고 있다.

주요언어 : 언어는 포르투갈어(portuguese)가 공용어와 상용어로 사용되며 스페인어와의 유사성으로 인해 국민 대부분이 스페인어의 이해가 가능하다. 또 기존에 폐쇄적이었으나 최근 구라파 여러국과의 급속적인 교류로 인해 영어와 불어의 사용이 가능한 지식인들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

관광제안
이탈리아에는 칸초네, 프랑스에는 샹송, 스페인에는 플라멩고, 그리고 포르투갈에는 파도가 있다. 파도는 라틴어로 'Fatum'에서 나온 말로 '운명', '숙명'이라는 뜻으로 신의명령에 의해 이미 예정된 인생은 변경할 수 없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마 포르투갈의 역사를 살펴보면 왜 이러한 의미를 지닌 파도가 포르투갈 국민들의 삶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포르투갈은 인도항의 발견을 기점으로 '발견의 시대' 또는 '대 항해의 시대'라 지칭되는 15 ∼ 16세기, 두 세기에 걸쳐 유럽세계의 정신적, 문화적, 공간적 개방 운동을 선도하며 자신이 속한 유럽 세계가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만나도록 하여 인류역사의 새로운 지평선을 그었으나, 그 화려했던 해양대국으로서의 영광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라지고 지금은 조그마한 유럽의 빈국으로 남아있다.

파두는 이렇게 최강의 해양대국에서 서유럽의 최빈국으로 전락한 포르투갈의 흥망성쇠, 그 자체인 음악으로 주로 불행한 사랑, 이별의 고통, 슬픈 운명을 노래하고 있는 멜랑콜리한 노래이다. 그래서 항상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감도는 달빛을 연상시키는 어두운 분위기에서 불러진다. 검은 드레스 위에 역시 검은 숄을 걸친 채 곧게 서서 온몸으로 열창하는 파두 가수(Fadista)의 애조 띤 목소리는 심금을 울리며 전율을 느낄 정도로 애잔하다. 가끔은 생각에 잠긴 듯 살포시 눈을 감은 채, 또는 기쁨을 연상케 하는 신비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사랑과 질투와 별리의 슬픔을 이야기하는 파두 가수의 노래는 비록 가사를 잘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쉽게 황홀의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 전통적으로 두명의 기타리스트가 팅겨대는 기타와 여리면서 애절한 음만이 가수의 목소리를 떠받쳐주고 있는데, 이는 파두 가수와 청중들간의 가슴 뭉클한 교감을 쉽게 나누게 해준다.

파도는 포르투갈의 토속적인 음악, 그리고 아랍인의 음악기법(포르투갈은 아랍문화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이 어우러진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파도의 기원이 아랍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중세에까지 거슬러간다고 여기고 있다. 혹자는 리스본을 드나들던 선원들에 의해 19세기 브라질에서 유래하여 리스본의 부랑자계층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고 하나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고 있다. 실제 초기에는 리스본 항구 선창가의 하층민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고, 점차 시민들의 관심을 끌게 되고 귀족계층이 참여하게 되면서 현재의 파도로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매력이 넘치는 도시인 리스본의 호젓한 밤거리를 거닐다 어렴풋이 애잔하게 들려오는 파도음악을 듣게 되면 남편이나 애인, 또는 자식을 기약할 길 없는 머나먼 바다로 내보낸 여인네들의 슬픔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듯 하다.

이러한 파도의 특징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목을 최대한 뒤로 젖혀 가슴 속 감정을 뽑아내는 '멜리스마' 창법, 만돌린 비슷하게 생겼으며 청아하고 감칠 맛 나는 음색의 '기타하(Guitarra-12줄의 포르투갈 고유 기타)' 반주, 그리고 이별과 운명을 즐겨 다루는 가사가 그것이다. 파도는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한'에 해당하는 포르투갈 특유의 '사우다드(Saudade)'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포르투갈의 정서인 사우다드가 곁들인 파도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 여름 밤 리스본의 알파마 Alfama나 바이루 알투 Bairro Alto에 가면 쉽게 접할 수 있다. 이 곳은 1755년 리스본 대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은 곳으로 옛 리스본의 풍치가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다.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의 미로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민의 애환이 서려 있어 그런지 왠지 모르게 이국적인 낯선 눈길에도 정겨운 느낌을 준다. 포르투갈의 영화로웠던 시절과 국민들의 애환이 서린 파도를 접하며 포르투갈의 문화를 이해해보자.

역사
이베리아 반도에 사람이 거주한 켈트족은 적어도 50만년 전의 일이지만 포르투갈에서 발견된 독특한 최초의 문화는 약 기원전 5500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750년경에 켈트족이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하면서 원주민과의 혼인으로 켈트이베리아인이 생겨나 현 포르투갈 국민의 원조가 되었다. 그후 그리이스인, 페니키아인, 카르타고인들의 지배를 거쳐, 기원전 2세기경 시저 및 아우구스투스의 원정으로 로마제국에 편입되면서 로마화가 시작되어 농경양식, 도시의 건설, 언어, 생활양식 등에 로마 문화의 영향이 매우 많이 남아 있기도 하다.

5세기초부터는 서고트족이 이주해 와 711년, 무어족의 침공을 받을 때까지 반도를 통치하였다. 12세기 무어족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아폰수 엔리케(Afonso Henriques)가 포르투갈의 왕이 되었으며, 1249년에는 Algarve지역을 통합함으로써 현재의포르투갈 국경의 기초를 이루었다. 13세기 중반에서 14세기초에 이르는 평화의 시기에 포르투갈은 경제, 문화적으로 발전을 거듭했고, 국가조직의 정비와 민족적 동질성 확립에 주력하였다. 1383년 왕위가 아비스의 가문으로 넘어갔으며, 아비스 왕조의 군주정치 하에 포르투갈은 유럽최초의 중앙집권국가가 되었다. 아비스 왕조의 군주들은 탐험주의를 적극권장하였다. 이후 포르투갈의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대가시작되어 인도항로 발견, 아메리카해안 조사, 브라질 발견 등 항로개척과 더불어 해외식민과 무역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여 스페인과 경합하였다.
1494년에는 스페인과 Tordesillas조약을 체결하여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아시아와 미의 동부를, 스페인은 북미와 남미의 대부분을 각 자국의 세력권으로 확보하였다. 1580년 아비스 가문의 세바스찬 왕이 북아프리카 원정중 전사한 뒤 왕위는 혼인을 통해 스페인에게 넘어갔고 이후 60년동안 스페인의 지배를 직, 간접으로 받게 되었다. 17세기중반이후 포르투갈은 식민정책의 축을 인도양에서 대서양 로 이동하여 브라질을 비롯하여 라이베리아, 앙골라, 모잠비크 등 아프리카 식민활동을 강화하였다.
스페인의 통치자들이 포르투갈을 소홀히 한 틈을 타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으로 1640년 포르투갈 왕위는 다시 포르투갈의 브라간사의 가문에 이양되었으나 영국에의 경제적 종속이 심화되었다. 19세기초 나폴레옹전쟁으로 세 차례의 침공을 받은 포르투갈 왕실은 브라질로 망명하기도 했으며 19세기 중엽 브라질의 독립으로 국력은 더욱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입법주의자와 절대전제주의자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어 격렬한 내란이 일어나고 정치적 불안의 계속으로 군주제가 전복된후 공화국이 수립된 1910년 혁명때까지 브라간사 왕조는 존속하였다.

1910년 혁명으로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 정국이 불안한 가운데, 1926년 무혈 쿠데타로 카르마나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하여 살라자르를 재무상으로 기용, 재정의 전권을 맡기고 극단적인 디플레이션 정책을 실시, 3년만에 경제재건에 성공하였다. 1932년에는 안토니오 데 살라자르(Antonio de Oliveira Salszar)가 수상으로 임명된 뒤 1933년에는 헌법을 제정하고 무솔리니를 모방하여 공화제적 조합국가의 체제를 수립함으로써 강력한 권한을 집중시켰다. 살라자르는 비밀경찰을 창설하고 검열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국민연합당이외의 정당을 인정하지 않는 등 장기 1인 독제체제를 구축하였다. 그의 New Satate 건설추진 정책은 정치적 안정은 이룩하였으나 경제, 사회적 발전은 부진하였다고 한다. 1968년 9월, 살라자르가 신병으로 사임하고 카에타노가 후임이 되었으나 국내 반체제파의 불만이 고조됨과 동시에 아프리카 식민지 등의 독립운동이 활발해졌다. 세계 최후의 식민지 제국이라고 불리던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카에타노 정권의 탄압정책은 여러 차례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국제적 분위기 속에서 74년 9월 민주화를 목표로 군부소장 장교등에 의한 무혈 쿠데타가 일어나, 40년 이상 계속된 독재정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1976년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그 이후 민주정치의 불안정기로 들어가게 된다. 쿠데타 후 대통령에 취임한 스피놀라 장군은 좌파의 압력으로 74년 9월 사임하고 고메스 장군이 새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76년 4월에 제정된 새 헌법에 따라, 같은 해 6월 총선거가 실시되어 안토니오 에아네스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또한 그 직전에 실시된 4.25 총선 결과에 따라 소아레스 사회당 소수 단독 내각이 제 1차 합헌정부로 출범하였으며, 그 이후 85년 11월 제 10차 합헌 정부까지 매년 정권이 교체 되는 등 민주정치의 외양은 유지되었으나 불안정한 국면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987년이후 사회민주당의 승리로 포루투칼을 이 정당이 지배하게 된다. 1986년 2월 16일 대통령 선거에서는 Soares 전 수상이 1926년 이래, 최초의 민간인 출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87년 7월 및 91년 10월에 제 11차 및 제 12차 합헌정부가 파코실바(Cavaco Silva) 수상의 사회민주당 단독정부로 각각 수립된 이래 포르투갈 민주화의 길은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다.

국제전화
한국으로 전화를 하려면, 호텔에서 전화를 이용할 경우는 다일얼링 순서는 0또는9번(외부전화 접속, 호텔마다 확인요) + + 82 + 0을 뺀 지역번호 + 전화번호
공항또는 시내의 국제전화가 가능한 공중전화를 이용할 때 + 82(한국 국가번호) + 0을 뺀 지역번호 + 전화번호를 누르면 된다.

유용한전화번호
▣ 포루투칼 대사관
주소 : EMBAIXADA DA REPUBLICA DA CEREIA AV.5 DE OUTUBRO, 68-7 APARTADO 1031 1000 LISBOA CODEX PORTUGAL
전화:793-7200/3

▣ 긴급연락처(경찰서, 병원 등)
경찰서는 : 1150
화재 신고 및 구급차 호출은 : 352-222
응급 앰블런스 : 301-7777
리스본 대학 병원:796-1181

전압 및 주파수
220볼트/50Hz

주의사항
▣ 다른 유럽국가 처럼 수도물 대신 미네랄 워터를 사 마시는것이 안전하다.

▣ 노동의 허가없이 취업하였을 경우는 불법취업법의 적용을 받게 되며, 그외에도 매춘방지법이나 마약소지법 등도 여행자가 포르투갈에서 특히 주의할 법규중의 하나이다.

▣ 시내에서 출입이 금지된 지역은 군시설 및 항만시설, 그리고 출입국을 제외한 세관의 출입국 관리 카운터 내부은 출입을 할 수 없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은 원칙적으로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 많다. 거리에서 특정인의 사진을 찰영하는 것도 본인의 동의를 얻어야만 한다. 기타 유의할 점으로는 공공공장소에서의 고성방가나 자동차의 난폭한 운전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

▣ 포르투갈의 토산품에는 금은세공품과 향토인형, 도자기나 장식타일, 레이스제품 등을 비롯한 수공예품과 민속제품이 있고, 코르크제품이나 와인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품들이다. 일반 상점들은 보통 오전 9시∼오후 1시까지와 오후 3시∼7시까지 영업하며, 토요일은 오전 9시∼오후 1시까지만 영업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유명관광지에는 일요일이나 축제일에도 영업하기도 한다. 구입한 대부분의 상품에는 17% 정도의 부가세(VAT)가 가산된다.

▣ 포르투갈은 물가가 다른 나라에 비해 비교적 싸므로 쇼핑하기에 부담이 없다. 기념품으로는 코르크나 작은 도자기 공예품, 포도주(포트 와인) 등이 좋다. 기념품 가게를 다니다 보면 자주 눈에 띄는 것이 코르크 판에 포르투갈 관광 명소를 그려 놓은 아줄레주를 붙여 놓은 벽걸이가 있는데 선물용으로 아주 좋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이것을 냄비 받침으로도 쓸 수 있기 때문에 적합한 선물일 것이다. 포르투갈의 상징인 닭모양의 포도주 병따개 등도 특징 있고 부담 없는 기념품이 될 수 있다.
주로 이곳 사람들은 단정한 정장을 입는다. 포르투갈 신사들은 극장에 갈때도 자켓과 넥타이를 맨다. 더운 포루투칼 날씨에도 불구하고 포루투칼 동료가 먼저 자켓을 벗지 않는 다면, 미리 먼저 벗어선 큰 실례가 될 것이다. 포르투갈의 Business Women은 한벌의 정장보다는 온화한 색의 옷을 입는다.

▣ 기후가 온화하여 여름과 겨울의 차이가 적고, 옷의 착용도 편리하다. 그러나 겨울에는 비가 자주 내리므로 레인코트를 준비하는 것이 편리하다. 신사복이나 정장의 구입은 쉬운편이나 와이셔츠나 내의 양말등의 면류는 지참하는 것이 좋다. 부인복의 경우 실크제품은 대개가 수제품이므로 고가이고, 필요시에는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으며, 그밖의 의류품이나 구두 등은 현지 조달이 가능하다.


시차 : -9시간



▶ 리스본 [Lisbon]

이곳은 대륙의 끝. 여기서부터 바다가 시작되다」라는 포루투갈의 대표적인 시인 까몽이쓰의 표현대로 유럽 대륙 최서단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마한 나라 포루투갈. 유럽에 속해 있으면서도 왠지 북아프리카 분위기가 느껴지는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그리스 신화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건설했다는 전설 속의 도시이다. 이를 가리켜 오디세우스의 도시-오리시포, 현지인들은 리스보아 Lisboa라 부른다.

리스본은 B.C 12세기에 페키아인에 의하여 항구도시로 역사상에 처음 등장했다. 이 후 그리스·로마·이슬람·스페인에 지배가 차례로 이어지는 오욕의 세월을 경험한다. 1249년 국토 회복에 성공한 알폰소 3세가 리스본 천도를 명하면서 포루투갈의 수도 리스본이 탄생하였다. 그러다 1755년 대 참사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리스본의 대지진'으로 6일간 도시 전체가 불바다 속에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슬프기는 마찬가지다. 살라자르의 우익 독재정권에서 출발하여 '빨간 카네이션'으로 상징되는 '리스본의 봄'의 주창자 안또니오 스삘놀라의 쿠테타가 있었던 1974년까지 경찰국가 하에 전 국민이 신음해야 했다. 오늘날 도시 곳곳에 남겨진 오래된 건물들은 이런 과거사를 전해준다.

땡땡 소리를 내는 낡은 전차 소리, 물건을 사라고 소리지르는 거리의 상인, 높은 언덕 위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달동네, 저 아래로 하얗게 반짝이며 흐르는 떼주 강. 이 모든 것들이 주는 느낌이 안쓰러우면서 따뜻한 리스본은 오래된 도시지만 젊은 느낌을 준다. 영화로웠던 과거의 흔적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는가 하면 씩씩하게 미래를 준비하는 젊은이의 기상도 엿보인다. 인파와 소음, 교통체증으로 부산하긴 하지만 낮은 스카이라인과 떼주 강의 산들산들한 미풍 때문에 소박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꼬불꼬불한 골목길과 네모 반듯한 대로가 공존하는 매력적인 도시이다. 밤이 되면 골목 어딘가의 선술집에서 구슬픈 파도 가락이 흘러나오고 아침이면 거리마다 축복을 담은 햇살이 따사롭다. 이곳의 꾸밈없는 진솔한 분위기와 군데군데 독특하게 멋을 부린 맵시가 돋보이는 산뜻한 건축양식이 매력적이다. 리스본이 관광객을 끌어당기는 것은 바로 이런 매력과 물가가 싸다는 장점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리스본은 현대 도시의 냉소주의와 성급함이 남아 있지만 그곳 사람들의 친절함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리스본의 옛 파사데그 Facades 양식들은 재개발의 열풍속에 사라져 가고 있으니, 아르 데코 Art Deco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두르는 것이 좋다.

교육
포루투갈의 의무교육제도는 7세 ∼ 10세까지를 대상으로 한 4년의 초등교육과 11세 ∼ 12세 대상의 예비교육 과정 2년, 그리고 13 ∼ 15세를 대상으로 한 중등교육의 통일 과정으로 3년이 있어 총 9년간을 의무교육연한으로 정하고 있다. 보충과정으로 16 ∼ 17세를 대상으로 한 2년이 더 있으며 보충과정 2년 중 후반기 1년에 대해 대학과정 진학희망자는 대학예비과정을 수료할 수 있다. 고등교육기관인 종합대학과정은 4년제에서 6년제가 있으며 문학부 등은 4년이고 법학부는 5년, 의학부는 6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과정을 마친 뒤에는 학사자격을 취득하게 되며 기술대학과정은 3년으로 학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 포루투갈어 학습기관에는 사설 어학원이 많다. 리스본 시내에 있는 Centro International de Linguas는 레슨 회수별로 12과, 20과, 50과로 나눈 3가지 코스가 있으며 오디오 등 설비도 갖추고 있다. Centro Audio-Visual de Linguas는 초급, 중급, 고급과정으로 분류되어 레슨회수별로는 8주간에 80과를 교육하거나 8주간에 48과를 교육하는 과정, 또 5주간에 20과를 교육하는 과정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오디오와 비디오를 이용한 학습시스템이 갖추어져 있고 어학실습실을 통한 연습과 강의를 조합하여 가르치고 있다. 각 개인별 레슨이나 10명 이내의 레슨은 International House를 통해 하기도 하는데, 기간은 4주간과 3주간의 2종류가 있다.

종합대학으로는 리스본 종합대학교 Universidade de Lisboa가 있다. 1911년 지금의 대학교로 복원되었다. 1290년에 세워진 중세 리스본 대학교가 그 기원으로 코임브라대학교와 역사를 함께 한다. 포르투갈과 알가르베를 합친 후, 디니스 왕은 유럽 전역에서 오는 학자를 입학시켜 공인된 학위를 주는 일반 연구소에 기금을 냈다. 그후 이 대학은 코임브라로 여러 번 옮겼다가 리스본으로 되돌아왔다. 1377 ∼ 1537년까지 리스본에 있다가 다시 코임브라로옮겨져서 지금까지 계속 그곳에 있다. 1911년에 지금의 자매 대학교가 리스본에 세워졌다. 현재 과학·문학·법학·약학·의학·심리학·교육학 등의 학부가 있다. 외국인이 입학할 때는 엄격한 심사와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코임브라 대학과 함께 하계특강이 매년 열리고 있기도 하다.

산업
시가지는 3개 부분으로 나뉜다. 중앙부는 바이샤라고 부르는 저습지로 거의 전 지역이 지진 후에 재건되어 상업·행정기관이 이곳에 집중한다. 동부는 본래 페니키아인·로마인의 거리였던 옛 시가지, 서부는 신 시가지이고 또 최근의 시가지 확장은 북부로 펼쳐 나가고 있다. 독·부두 등 항만시설은 떼주 강 우안을 따라 30Km에 걸치고, 그 북동부에 곡물·냉장창고 및 시멘트·정유·철강·코르크제품 등 공장이 자리한다. 어항은 벨렘 서쪽에, 대서양 각지를 잇는 여객항은 시 중심부에 위치한다. 1966년에 떼주 강에 가로놓인 현수교가 완공되어 강의 좌안에도 철강·화학·조선 등 대공장이 건설되어 발전하고 있다.

대서양의 영향을 받아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전형적인 해양성 기후를 나타낸다. 특히 5 ∼ 9월은 별로 덥지도 않고 쾌청한 날씨를 보여 여행하기 아주 좋다. 연평균 기온이 12 ∼ 18℃로 일년내내 날씨가 좋아 아무때나 떠나도 괜찮지만 11 ∼ 12월 에는 비가 자주 오므로 유의하자. 1 ∼ 2월 날씨는 우리나라의 봄과 비슷하다.




▶ 포르투

포르투는 포트와인의 원산지로 잘 알려진 포루투갈 북부의 주도이다. 도우로 강 하구에 펼쳐진 인구 40만의 포루투갈 제 2의 대도시로 포루투갈 상공업 중심 도시며 대항해 시대 때는 해양 무역의 거점 도시로 큰 번영을 구가한 곳이기도 하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포루투갈 최대의 상공업 중심지가 되었다. 포르투 인들은 스페인 세력과 무어인의 침략에 맞서 싸웠으며, 1800년대에는 나폴레옹의 세력까지 물리쳐 '난공 불락의 도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포루투갈의 도시 중에서도 자의식이 가장 강한 도시로 평가받고 있는 포르투는 수도인 리스본과 팽팽한 경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복잡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공업 도시이면서도 역사적 유물을 잘 보존하여 문화와 예술이 살아 있다. 수도 리스본이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분위기인 데 반해 포르투는 산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부유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한가로운 시골 풍의 작은 도시가 이어지는 다른 지방을 여행하다 이곳에 들어서면 비로소 '도희에 왔구나'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도우로 강 건너편 포도주 공장지대 빌라 노바 데 가이아 Vila Nova de Gaia에 가면 수많은 와인통이 쌓여있는데 무료로 구경도 하면서 와인을 맛 볼 수 있다. 언덕으로 이루어진 도시를 걷다 보면 활기찬 상업 지구가 눈에 띄는가 하면 조용하고 한가로운 공원도 곳곳에 있어서 도시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포르투는 아랍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도시들과는 달리 가장 유럽적인 포르투갈의 도시이다. 이 도시의 중심에 있는 건물들은 다른 유럽 국가들의 건축물들을 축소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유명한 포트와인을 숙성시키는 포도주 창고를 비롯해서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 등은 방문할 만한 가치가 있다. 포르투에서 가장 매력적인 곳은 리베이라Ribeira 지역으로 유럽에서 가장 우아한 3개의 다리가 협곡에 놓여 있으며, 타일로 된 집들이 도로에 가득차 있다.

산업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도우루 강 하구에 가까우며 예로부터 항구도시로 발전하였다. 포도주의 수출로 가장 유명한데 바로 이곳의 지명에서 따와 포트 와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포트 와인은 발효시킬 때 브랜디를 혼합해 알코올 함량을 높인 후 숙성시킨다. 포트 와인 교역이 처음 시작된 때는1678년이며, 영국과 포르투갈 사이에 체결된 메수엔 조약(1703)의 규정에 따라 공식적으로 교역이 수립되었다. 1906년의 법령은 도루 주에서 생산되고 포르투에서 수출되는 알코올 함량 16.5% 이상의 포도주를 포트 와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인구의 1/3 이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농업과 수산업이 주요 산업이다. 온난습윤성 기후와 전반적으로 비옥한 토양 덕분에 집약적인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겨울곡물과 여름곡물, 채소, 묘목재배(코르크나무·올리브)를 포함하는 혼합농업으로 대가족 단위의 농가는 1에이커에 못 미치는 작은 구획으로 분할된 작은 토지를 경작하며 생활하고 있다. 목재 및 그와 관련된 합성수지산업, 시큼하고 거품이 약간 이는 비뉴베르데 포도주 생산이 오지 계곡에 사는 농부들의 유일한 소득원이다. 포르투 바로 북서쪽에 마토시뉴스의 대서양 연안에는 수심이 깊은 인공 항인 포르투데레이숑스가 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많은 주택사업을 포함해서 대규모의 도시개발 계획이 실행되어 환경이 개선되었다. 해안 고속도로와 나란히 뻗어 있는 해안철도는 포르투와 리스본 사이를 운행하는 전동열차이다. 철도와 간선도로로 동쪽의 브라간사까지 연결되어 있다. 도루 강에 있는 크레스투마 수력발전소가 포르투에서 30Km 떨어진 지점에 있다. 주요 수출품으로는 통조림이 있으며 그밖에 도기·주물·방적·피혁·양모공업이 발달하였으며 금세공도 활발하다.

자격있는 여행전문가 - 모두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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